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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1975년 크메르루주 세력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자, 미국 <뉴욕타임스> 특파원의 통역을 하던 주인공이 겪는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 논란거리가 있지만, 캄보디아의 비극을 전세계로 알리는 데 이 영화가 한몫했다. 캄보디아 현대사가 지닌 색깔은 죽음의 잿빛이다. 20년 내전과 베트남 전쟁의 불똥으로 숱한 생목숨이 희생됐다. 희생자 규모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최대치는 15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올라간다.

사건은 30년 전에 벌어졌지만, 킬핑필드 관련자에 대한 공식 기소 절차는 4월 들어서야 시작됐다. 향후 재판이 열릴 장소는 캄보디아와 유엔이 2006년 7월 공동으로 설립한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 법정. 그곳에 서게 될 피고들은 이제는 다들 노인이 된 크메르루주 정권 지도자들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몇 명이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크메르루주 최고지도자 폴 포트는 1998년 캄보디아 북부 정글에서 73살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따져볼 문제 두 가지. 첫째, 캄보디아에서 저질러진 학살범죄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주 지도자들뿐인가. 둘째, 캄보디아 학살이 1970년대 후반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에만 벌어졌는가.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만 국한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 학살에 관련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에게 사면장을 쥐어주는 셈이다.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 대통령이 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매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1975년 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고 말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5만∼15만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1994년에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 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