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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 지음)를 읽었다. 그리고 문뜩 ‘그가 억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여 명의 아시아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겨레21>의 설문조사에서 폴포트는 예상대로 1위로 나왔다. 말할 것도 없이 200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인 학살의 ‘원흉’으로서 그를 아시아판 히틀러로 평가한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인들에게 가장 영향이 컸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 꼽힌 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태평양 쪽 가해자인 일본의 히로히토 국왕이나 1급 전범 도조히데키보다 그가 더 ‘나쁜 놈’이었다.

이제 무덤에 묻힌 폴포트가 억울하지 않을까 하고 뇌까렸던 것은 킬링필드의 공범에 대한 분노이자 역사의 무지가 빚어낼 수 있는 잘못된 전설에 대한 반성이다.

1997년 이후 킬링필드의 주역을 법정에 세우려는 미국과 유엔의 압박에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1969~73년에 벌어졌던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 기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킬링필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핀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조사보고서인 ‘캄보디아, 10년간의 학살’은 이 기간을 1차 킬링필드라고 불렀다. 그리고 1975~79년은 2차 킬링필드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에선 60만 명이 죽었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다. 누구에 의해? 미국이다. 미국은 캄보디아 산악지대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전쟁 물자 운송을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의회와 언론에 이 사실을 숨긴 채 메콩강 일대에 4년 동안 50만t의 재래식 폭탄을 쏟아부었다. 당시 미 백악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베트콩들이 남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 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 공산당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논리를 충실히 따른 폭탄에 맞거나, 폭격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바라보며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숨졌다.

그러고 나서야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가 1975년 등장한다. 폴포트는 미국 괴뢰정부 론놀에 봉사했던 지식인과 시민 10만 명을 처형했고, 이후 집권 5년 동안 질병과 기아로 숨진 이들이 70만~80만 명에 이른다. 폴포트는 마오사상의 이상을 실현시킨다며 지식인들과 숙련된 기술자, 근로능력이 없는 노인들을 색출해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에 투입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단체들이 캄보디아 구호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차단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킬링필드의 주연은 크메르루주, 조연은 북베트남이라며 자국 정부의 논리를 충실히 세계에 퍼뜨렸다. <킬링필드>란 영화도 크메르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켰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학살 책임은 알려진 게 거의 없을 정도다. 촘스키는 <프로파간다와 여론>에서 “1970년대 초에 캄보디아 농촌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집중적인 폭격을 지시했던 사람들도 당연히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밝힌다. 그가 말하는 폭격을 지시한 사람들은 바로 닉슨과 키신저 등 미국의 고위 정부관료들이다.

킬링필드에서 죽은 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은 말이 없고, 죽인 자들도 말이 없다. 그래서 역사는 지켜보는 자들의 몫이다. 킬링필드의 책임을 모두 폴포트에게 돌리는 것은 우리가 아시아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