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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1987년 대선 당시 군 부재자 투표에서 노태우 후보를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타당해 숨진 한 사병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저는 몸에 소름이 돋는듯하였습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87년 7월 군번으로 의정부 306 보충대를 통해 입대해서 5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경기도 연천 대광리 XXX포병대대 알파 포대로 배치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대선이 있었습니다. 투표 전에 포대장(대위)이나 선임하사 등 간부가 여러 차례  포대원을 집합해서 노태우를 찍어야 한다고 정신 교육을 했으며 다른 후보를 찍어도 어차피 사단 통신 보안 검열에서 다 걸러지기 때문에 소용없다고 여러 차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를 찍을지 손을 들어 의사 표시까지 하도록 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머리 깎고 푸른 옷 입어, 아직 군대의 생리를 채 파악하지도 못한 저는, 손을 들고 난 노태우는 찍을 수 없다고 의사를 표시하였고 김영삼을 찍겠다고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포대에서 2~3명 정도가 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우리는 모두 정신교육과 포대장 면담을 별도로 받았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포대원은 면담 도중에 다 전향(?)하였고 저만 마지막까지 반대하는 사병으로 남았습니다.

 

얼마 후 부재자 투표 전날, 일과 시간이 지난 밤에 행정반에서 저를 부르더니 대대 본부로 가라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대대 본부에 갔더니 그곳에는 다른 포대에서 온 병사들이 너댓명 더 있었고 우리는 함께 대대장실에 들어가 대대장 면담을 하였습니다.

 

중령 계급장이 어깨에 올려진 대대장은 상당히 신사적으로 우리를 대우하였습니다. 이병 계급장의 문제 사병에게도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개인적인 신상을 물었고, 신학대학 졸업했고 앞으로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저의 대답을 듣고 본인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없지만, 아무튼 대대장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했고 그 위세에 눌린 병사들은 누구도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면담을 마친 대대장은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자대로 돌아가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자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그래 어쩔 수 없다. 대대장이 이렇게까지 당부하니 1번 찍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다음날 부재자 투표가 포대에서 진행되었는데 참 희한한 투표였습니다. 행정반에 기표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기표소의 앞 가림막은 걷어서 안이 훤하게 보였으며, 기표소 바로 옆에는 상사인 인사계가 서서 손가락으로 여기 찍으라며 친절하게 개인 지도까지 하였습니다. 차례차례 기표하다가 제 순서가 되었는데 인사계는 저에게는 투표용지를 주지 않고 자기가 직접 1번 칸에 기표해서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날 밤에 있었습니다. 포대장이 밤에 저를 불렀습니다. 포대장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 넌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니 내가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 딱 그 말만 하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며, 죽음과도 같은 고난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어리바리한 이병이 군대가 어떤 곳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기상해서 아침 점호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오전 일과를 막 시작할 즈음에 포대장이 또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장 대대본부로 가라고 했습니다. 또 다시 영문도 모르고 대대 본부 행정반에 갔더니 대대장 명령이라며 지금부터 대대 교회에서 군종병으로 근무하라고 했습니다. 급하게 온다고 못 가져온 더플백은 얼마 후에 본부로 배송되어 왔습니다. 그날부터 저의 군 생활은 풀렸습니다. 만기 전역할 때까지 소속은 알파 포대, 근무는 본부 파견 군종병으로 대부분의 일과에서 열외가 되어 마음껏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선임 군종병이 부재자 투표하던 날 외출했다가 복귀하던 도중에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 사단 헌병대에 잡혀 영창에 들어갔습니다. 대대장이 다음 날 아침에 그 보고를 받고 분노하며 당장 군종병을 교체하라고 명령하면서, 알파 포대에 신학대학 졸업한 병사가 있으니 불러라고 해서 그날 아침에 불려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 영창 간 선임 군종병에게 미안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대장의 배려 아닌 배려로 부재자 투표의 엄청난 후폭풍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포대장의 마지막 말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에서 본 그 사병이 어쩌면 나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글자 적어서 남겨 둡니다.

 

87년 대선에 나는 투표권이 부재했던 부재자,  대한민국 육군 이병이었습니다. (201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