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탄생

by 로꾸루톰 posted Jun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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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체능 포기자였습니다. 교회에서도 다른 건 다해도 찬양대는 억지로 끌려가서 해 본 적은 있어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미술 시간, 체육 시간은 고역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안식년으로 한국에 갔을 때 코로나로 두 주간의 자가 격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모 자매가 격리 기간에 심심하지 말라며 그림 색칠하는 아이템을 몇 개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림에 일련의 번호가 있고, 그 번호에 맞는 물감을 칠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 처음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는데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색칠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도 금방 잘 가고 점점 완성되는 그림을 보며 약간의 성취감도 생겼습니다. 격리가 끝날 때쯤에는 이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식년 기간에 일부러 구입해서 몇 점 더 색칠까지 했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캄보디아로 복귀할 때, 처음 그림을 준비해 주었던 자매가 캄보디아 가서도 취미로 하라면 또 몇 점을 구입해 주어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들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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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어느 날 문방구에 갔는데 그곳에 미술용품을 팔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물론 전에도 있었겠지만 그땐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요. 물감, 붓, 캔버스까지 모든 도구가 다 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문득 마음에 ‘남이 그려둔 그림에 번호 따라 색칠만 하지 말고 내가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감과 붓, 캔버스를 샀습니다. 문제는 제가 앞에서도 고백했듯이 미술엔 재능이 “0” 아니, “-100”이라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도 그려야지 색칠을 할 텐데….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인터넷에서 찾은 캄보디아 유명 화가의 그림을 프린트해서 주면서 캔버스에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색칠은 내가 할 테니…  아내는 음악, 미술에 있어서 제 기준으로 볼 때 거의 헨델이나 피카소급입니다.

 

아내가 대답하기를 뭐 그리 어렵게 그리느냐며 단번에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문방구에서 먹지 사서 그대로 베껴요.” 그 말 한 마디에 눈 앞에 신세계가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아하~ 그런 방법이…. 당장 문방구로 가서 먹지를 샀습니다. 먹지의 용도는 초등학교 때 돋보기로 햇빛 모아서 태우는 용도뿐인 줄 알았는데 이런데도 쓰일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낱장으로 팔지 않아서 100장 한 묶음을 사서 왔습니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놓고 그림을 정성 들여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처음 완성한 그림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여주며 새로운 화가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모두 입을 벌리며 감탄하였습니다. 제가 봐도 대단했습니다. 그 후로 몇 점의 그림을 더 베끼며 내공을 쌓아가던 때, 또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그림만 베끼지 말고 내 그림을 그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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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먹지로 베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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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완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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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자들 얼굴을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이 생겼습니다. 사진은 그림과 달라서 손자들 얼굴 사진을 먹지로 베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생각하다가 휴대폰에 사진을 그림으로 바꿔주는 앱이 예전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어 당장 검색해서 앱을 다운받아 손자들 사진을 그림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림이 된 사진은 더 이상 난관이 아니었습니다. 최첨단 복제 기술인 먹지 한 장이면 간단히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의 손자들 사진을 하나씩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깜짝 돌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화가 할아버지의 서명을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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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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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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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온이>

 

이젠 제 얼굴과 아내의 얼굴을 그려보려고 준비 중있습니다. 그동안 쌓인 내공으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전시회도 해볼까요? 퇴근해서 집에 오면 거실 탁자에 작업해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탁자는 물감 자국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내가 그림을 다 그리다니… 참… 내가 생각해도 희한하네요.(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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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사진                                     그림으로 변환                                먹지로 밑그림                                 색칠한 완성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