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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정치풍운아' 시하누크의 정치 역정

캄보디아 '독립의 아버지' 시하누크 전 국왕... 그가 걸어온 길

 


▲ 시하누크의 사진을 안고 슬퍼하는 여인 경찰집계 약 10만여명이 프놈펜 시내 도로가에 모여 뜨거운 태양 아래서 왕의 운구행렬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질곡 많은 동남아시아 현대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어내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지난 15일 새벽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당뇨와 고혈압 등 지병으로 그동안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던 시하누크 전 국왕이 이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그의 비서 시소와스 토미코 왕자가 공식 발표했고, 시하누크 전 국왕의 시신은 지난 17일 오후 특별기편으로 프놈펜 포첸통 공항에 도착한 뒤 주변 도로에 늘어선 10만여 인파의 애도 속에 왕궁으로 호송됐다. 이날 니에크 분차이 캄보디아 부총리는 "캄보디아에 크나큰 손실"이라면서 "전 국왕은 우리가 모두 존경하고 사랑한 위대한 왕이었다"고 애도했다.

 

외할아버지인 시소와트 모니봉 왕에 이에 18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시하누크는 1941년부터 1955년까지 14년간 국왕을 지낸 데 이어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다시 국왕으로서 무려 7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특히 첫 번째 통치 기간에는 독립과 베트남전쟁, '킬링필드'로 알려진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 등 여러 사건까지 겹치며 캄보디아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 시하누크 전 국왕의 운구행렬을 보기 위해 왕궁앞에 나온 시민들 프놈펜 포첸통 공항부터 왕궁까지 이어진 약 15킬로미터 도로변에는 10만여 명 이상이 모여들어 마지막 가는 전 국왕의 운구행렬을 지켜보았다.

 

두 차례의 국왕 즉위를 포함해 대통령, 총리, 국가수반, 망명지도자, 상왕 등을 거친 바 있다. 심지어는 작사, 작곡가로도 활동함은 물론, 영화제작에도 나서 직접 주연, 감독까지 맡은 영화도 십여 편에 달할 만큼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인물로 한때 기네스북에 가장 많은 직위를 가진 정치인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큰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소년'으로 당시 왕으로서 적임자는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선 최고 적격자로 보였다. 하지만 왕로 즉위하자마자 주변의 예상을 깬 정략적 외교술을 유감없이 발휘, 동남아근대사에 일대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동남아 현대사를 온몸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으로 2차대전 때부터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몰아친 식민과 독립, 열전과 냉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전,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상상가능한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때론 주역으로, 때론 패배자로, 종국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애썼다. 1953년 프랑스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동맹 불체결을 선언했다.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고 1961년 라오스 국제회의를 제창하는 등 국가의 중립화에 공헌했다.

 

독립과 쿠데타, 망명과 복위... '롤러코스터' 인생

 

 

▲ 왕궁으로 귀환하고 있는 시하누크 전 국왕의 운구행렬 27일 오후 5시 30분 경 중국 베이징에서 출발한 특별기가 무사히 프놈펜 왕궁에 도착했다. 전세계 외신들이 모여 이 역사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군주였지만, 향락적이고 사치스런 생활도 서슴치 않았다. 좌충우돌의 돈키호테식 정치행보와 교묘한 말 바꾸기로 종종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고, 공식 발표된 아들의 수만도 14명에 이를 만큼 문란한 생활을 했다. 큰아들 라나리드 왕자는 첫 부인의 소생이지만, 현 시하모니 왕의 어머니인 모니크 왕대비는 공식적으로는 6번째 부인이다. 결혼 당시 이미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나선 미인대회 입상자를 지금의 왕비로 삼았다(모니크 상왕비는 프랑스계 이탈리아 사업가와 캄보디아 왕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그는 서방 문화와 동양 왕실 문화에 물든 국제 외교가의 대표적 호사가이기도 했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그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1967년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 미망인 재클린은 시하누크 주관하에 연일 이어지는 서양식 연회에 질려 했을 정도다.

 

독립 뒤 1955년 아버지에게 거꾸로 왕위를 물려주고 그는 '상큼 리어스 니윰'이라 불리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 전 의석을 석권하는 등 첫 총선을 대승으로 장식했고, 국가주석, 총리, 외교장관을 겸임하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인생에서 있어서 최대 황금기였다.

 

그는 1960년대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한 주역으로 활약하며, 캄보디아를 한 강대국의 일방적 세력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열되는 베트남전은 그와 캄보디아를 몰락의 길로 안내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시하누크의 묵인하에 캄보디아 영내를 '호치민루트'로 잘 알려진 병참수송로로 활용했고, 1970년 미국은 친미 정치인 론놀 장군을 부추겨 베트남전에 비협조적이던 시하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 시하누크 전 국왕의 운구행렬 힌두교 전설에 나오는 가루다 신을 형상화한 운구차량의 모습

 

베이징으로 망명한 시하누크는 그 이후 영욕이 교차하는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 그나마 정처없는 초로의 망명객을 친구로서 따듯하게 맞아주던 중국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76년 지병으로 죽자, 그는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그를 위해 주석궁을 본따 지은 별장식 궁전도 평양 인근에 아직 있으며, 말년에는 평양을 자주 방문해 요양을 했다).

 

고인은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처음 만나 북한을 적극 지지해준 것이 인인이 되어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북한은 그의 망명생활 중 장수원이라는 궁전을 지어주어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프놈펜 도심에는 김일성대원수거리가 있으며, 시하누크는 2012년 1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태양절을 즈음하여 '국제김일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 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후 친미정권인 론놀 정부가 무너지고 1975년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주창한 크메르루주에 의해 장악되자, 그는 폴 포트가 이끄는 정권의 상징적인 국가수반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의 꼭두각시 지도자에 지나지 않았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폴포트는 시하누크를 다시 왕으로 추대 절대왕정국가로 회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시하누크의 명성과 인기를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결국 1년 만에 크메르루주에 의해 직위를 빼앗기고 정치적 은퇴를 강요당했다. 사실상 연금상태에 처해 목숨마저 위태한 상황이었으나, 중국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

 

 

▲ '독립의 아버지' 시하누크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왕궁앞에서 캄보디아 국기를 든 채 운구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루즈 정권을 타도했으나,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화를 우려한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12년 동안의 그의 외교활동에 힘입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4개 정파가 모인 가운데 종전협상을 타결지었다. 시하누크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 캄보디아 과도정부 수반에 선출됐으며, 2년 뒤 유엔(UN) 감시감독하에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첫 총선에서 큰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예상을 깨고 압승하자, 실력자 훈센은 내전 재발을 협박했다. 이에 시하누크는 아들에게 공동총리제를 설득해 제1총리직은 라나리드 왕자가, 제2총리직은 훈센이 나눠가지는 등 쌍두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해 그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후 1997년 훈센 측과 라나리드 진영의 권력 다툼 속에 무력충돌이 발생, 결국 왕당파인 라나리드 진영이 훈센 군대에 패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 비공식적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그의 장기인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 왕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불교 승려들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서도 킬링필드 시절 5만여 명의 승려 대부분이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결국 2004년 10월 건강 문제로 큰아들 라나리드 왕자 대신 모니크 왕비의 첫 번째 소생인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요양차 베이징과 평양 등을 오가는 등 주로 해외에서 보내다 지난 15일 새벽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영욕이 뒤얽힌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비극의 주인공은 시하누크 나 자신이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라는 말로 갈음한 적이 있다. 조국을 지키려고 했던 한 약소국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역량과 그 한계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그의 일생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였다.

 

시하누크는 지난 1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항아리에 넣어 왕궁의 사리탑에 보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시하누크의 시신은 3개월 동안 안치됐다가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될 예정이다. 중국은 이번 시신 호송에 외교담당 국무위원 다이빙궈를 동행시키고 톈안먼 광장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를 다는 등 각별한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