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21 16:56

킬링필드와 신대륙

조회 수 1166 추천 수 4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1997년 단독 집권한 이후 ‘총기와의 전쟁’을 치러 왔다. 오랜 내전의 후유증으로 캄보디아에서 총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크메르 루주를 비롯한 반군이 궤멸됐지만, 총은 회수되지 않은 채 대량 유통됐고 이에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 다른 총기 소지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경제 부흥을 위해 강력한 개방정책을 펼친 훈센 정권에 총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킬링필드’의 이미지와 불안한 치안은 외국인의 투자를 막았고, 앙코르와트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구경하려는 관광객의 발목을 잡았다.


훈센 정권은 1999년부터 대대적으로 민간이 보유한 총기를 회수하는 정책을 폈고, 수십만 정을 햇볕 아래로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때 도입한 것이 총기를 자진해서 반납하면 가격의 80%가량을 정부가 지급하는 보상 프로그램이었다. 먹고살기가 힘든 캄보디아 국민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훈센 정권은 그 대신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적발되면 징역 5∼10년의 중형에 처하는 법안을 만들어 ‘당근과 채찍’의 양면정책을 폈다.


총을 정부가 사들이는 프로그램은 총기의 천국이라고 할 만한 미국에서도 시행됐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에서 총은 시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의 하나인 자위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총기 소지를 허용한 연방헌법 수정 2조는 연방정부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무법천지의 건국 초기에 생겨난 뿌리 깊은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것은 마치 생명의 위협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국가가 책임질 수 없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개인의 무장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1999년 콜로라도 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지면서 총기 소지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지만 헌법상의 권리인 ‘자위권’이란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정부가 총기 규제 정책을 펼 경우 선량한 시민은 순순히 총을 내놓겠지만 마피아나 갱단, 테러리스트들은 결코 총기를 내놓지 않을 것이며 결국 선량한 시민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게 반대론의 요지였다. 이미 총기가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100% 회수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이기도 하다.


총기 소지가 금기시돼 있는 한국인에게는 뜨악한 일이다. 한국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직후인 1912년 총독부령으로 ‘총포화약류 취체령’을 공포 시행했고, 이는 광복 직후 미군정의 ‘불법무기 소지 금지령’을 거쳐 1961년 제정된 지금의 ‘총포 도검 화약류에 관한 법률’의 모태가 됐다. 일제가 총기 소지를 강력하게 차단한 배경에는 식민지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캄보디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 총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천양지차다.


캄보디아가 무엇보다 절실했던 ‘빵’을 위해 총을 거둬들였다면, 미국은 ‘권리’라는 이름 아래 총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두 나라가 각기 걸어온 역사와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의 비극이 사건 그 자체와는 별개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 공공의 이익, 국가의 역할 같은 고전적 주제를 다시 곱씹어 보게 하는 이유다.


  • ?
    로꾸루 톰 2007.04.21 16:57
    요즘도 자주 총기 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립니다. 또 현지인들을 통해 어느 집에 총기 강도가 들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가끔씩 밤에 경찰들이 길을 막고 지나가는 모또돕을 모두 세워 검문하고 몸을 뒤지는 광경을 보기도 합니다. 불법 무기 단속입니다. 돈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은 허리춤에 권총을 낀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기도 합니다. 먼저 지도층에서 총에 대한 이런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총기 수거는 요원할 듯합니다.